[경북/고령] 숨어있던 땅 대가야를 느끼다~! 1
대가야의 땅 고령을 가다....
아이가 방학도 되어가고 날씨도 춥고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먼저 청도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아봐 두었던 고령으로 갑니다....
고령은 대가야의 발생지이고 대가야의 수도였으며, 가야문화의 절정을 이룬곳입니다.
사실 신라,고구려,백제는 많이 알려져있으나 가야는 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아이에게 보여주는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먼저 대가야에 대한 상세 설명을 네이버에서 발췌하고 공부를 해봅니다...
네이버백과사전 발췌 전문....
562년 멸망.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 王)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 존속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대가야로 언급한 기록도 있으나 맞지 않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가야연맹은 4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의 침입으로 큰 타격을 입고 세력이 약화되면서 신라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
반면 5세기 이후에는 고령·합천 등 경상도 내륙 산간지방의 농업에 유리한 입지조건과 제철(製鐵)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중심지로 떠올랐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룬 반파국(伴跛國:고령지역에 있던 소국)은 5세기 후반에 새로이 시조설화를 만들며 대가야를 표방하였다. 대가야는 합천·거창·함양·산청·아영·하동·사천 등지를 포괄하는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로서 국제사회에도 등장하였다.
479년에 가야왕[加羅王] 하지(荷知)의 이름으로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내 작호를 받았고, 481년에는 백제·신라와 동맹하여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까지 진행된 급속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활동의 폭이 매우 제한되었다. 554년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크게 패하고, 오히려 562년 신라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대가야는 정치적으로 삼국보다 발전하지 못했지만, 문화적으로는 가야금을 제작하고 음악을 정리하는 등 높은 문화수준을 보유하였다. 또한 지산동 고분을 비롯하여 본관동·중화동·양전동·종암동·쾌빈동 등 고령지역에 분포한 유적지에서 출토되는 많은 유물들은 가야연맹의 맹주인 대가야의 발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에도 언급이 되지만 가야라하면 여러개의 소수국가가 연맹형식으로 형성되었던 나라입니다.
그중에 많이 알려진건 가야의 시초 김해의 금관가야이지만, 백과사전에 나온데로고령은 대가야의 더 중심이었고 더 막강한 권력이 있는 말 그대로 가야제국의 맹주였습니다...
그 맹주의 수도 고령에 대가야를 기념하는 여러곳의 박물관과 전시물들이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오늘은 대가야박물관과 우륵박물관, 그리고 대가야 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대가야 역사테마관광지를 둘러보았습니다.
위 사진은 대가야 박물관의 정문 모습입니다~!
대가야박물관 인근에 바로 보시는데로 고분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이 바로 여기이죠.
위사진은 대가야 박물관 주차장쪽에서 바로 보이는 고분군입니다.
대가야 박물관을 알리는 간판...
대가야 박물관 맞은편에 위치한 대가야 테마관광지...
대가야 박물관 정문에 있는 대가야 시대의 주거형태(움집)입니다.
그 당시의 주거형태를 보여주는데흔히 우리가 옛집하면 막연히 떠올리는 한옥과는 거리가 한참멀죠...
사진 두장중에서 윗사진은 주거형가옥이고 아래 사진은 창고입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인증샷....
빠질수 없죠~!!!